허황후 -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


Empress Hur Hwang-ok

허씨는 48년 가락국 수로왕비인 보주태후(普州太后) 허황옥이 아유타국(인도의 한 나라) 군주의 공주로서 16세때 배에다 석탑을 싣고 지금의 경남창원군 능동면 용원리에 있는 부인당으로 들어와 정박을 했는데 김수로왕이 왕비로 맞이하였다.
수로왕은 10남 2녀가 있었는데 왕비가 자신이 죽은 후에 성씨를 전하지 못함을 슬퍼하자 두 아들이 모성을 따르게 하여 우리나라 허씨의 시초가 되었다. 허씨는 김해 김씨, 인천이씨함께 같은 혈족이며 종친회명을 '가락중앙종친회'로 만들어 이에 속해있다.
고대 한반도에 가락국이란 나라가 있습니다. 수로왕이 그 시조인데 그 부인인 허황옥은 아유타국 공주이라고 우리나라 역사책인 <삼국유사>에 씌여 있습니다.
아유타국은 옛날 갠지스 강에 있던 도시국가였습니다. 수로왕은 성이 김씨인데 아유타국공주와의 사이에서 자손이 많이 나서 오늘날 수 백만 명에 이르는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가락국의 국기(國旗)또는 문장(紋章)은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보는 쌍어문(雙魚)입니다.
그런데 우연인지 몰라도 그 쌍어문이 인도의 아유타국 옛 땅인 아요디아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가락국과 인도의 아요디아는 고고학적으로도 깊은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그런데 왕후의 시호가 보주 태후입니다. 보주가 그 사람의 출신지를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보주를 찾아 보았더니 인도 땅이 아니라 바로 이곳 사천성의 안악이란 곳의 옛이름 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허황옥이 가락국에 시집온 서기 48년쯤에 중국의 사천지방, 즉 당시로서는 촉(촉)땅에서 무슨 정치적 사건이 있지 않았나 해서 중국 역사책을 찾았죠. 그랬더니 놀랍게도 후한 때인 서기 47년에 촉땅에서 토착민족이 한나라 중앙정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있었고 반란은 한군(漢軍)에 의하여 진압된 적이 있습니다.
이때 7천명이나 되는 반란의 주동자들이 모두 체포되어 강하(江夏)지방(오늘날의 무창)으로 강제 이주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0년 후에 또 토착민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그 주모자 가 한군에게 항복한 적이 있습니다. 그 주모자의 이름이 허성(許聖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대만에서 나온 <변강민족사>(邊彊民族史)라는 책에 허성 집단의 반란사건이 인용되어 있었다.
허성(許聖)의“허”는 성(姓)이 아니라 직업 무사(巫師)를 부르는 명칭이라고 하였다. 즉 ‘신앙지도자로서 신분이 세습되는 사람을 “허”라고 불렀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허”라는 말은 사람이름 앞에 붙는 칭호로서 신부(神父), 목사, 승(僧)과 같은 종교적 칭호였던 것이다.
그 책 뒷부분에 직업무사인“허”는 그 사회에서 존경받는 계층이라는 설명이 있었다.
따라서 허황옥은 첫 번째 반란이 실패했을 때, 강제 이주 당한 지도자급 가계(家系)의 한 여인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들은 정착했던 양자강중류의 무창지방을 거쳐 양자강을 따라 상해 지방으로 간 다음 바다를 건너 한반도 김해의 가락국에 도착 한 것 같습니다. 허황옥 일행은 촉(蜀)땅 ,즉 보주를 떠나 꼭 1년 만에 가락국에 도착한 것이지요. 보주 출신인 허황옥이 가락국에 와서 왕비가 되어 살다가 죽자 고향의 이름을 따서보주태후라고 붙인 것으로 생각 됩니다.-(駕洛國 首露王妃 普州太后 許氏陵)

[고려사이버대 고려특강] 김수로왕과 허황옥 공주 - 김병모 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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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sa stone pagoda at the bottom of the tomb of Queen Suro
출처 : The Korea Post(http://www.koreapost.com)